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 (문단 편집) === 근현대 그리스 ===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로마 제국은 멸망하였으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았다. [[메흐메트 2세]]는 전쟁으로 피난 간 그리스인의 복귀를 장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20세기 초까지도 그리스인 인구가 도시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자리잡았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함락 당시 [[성 소피아 성당]]에는 점령군이 물러나길 바라는 여성들과 성직자들이 [[성찬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튀르크 군대가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성직자들과 미사를 참례하던 신자들이 모두 벽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전사' 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시체는 확실히 발견되지 않은 [[콘스탄티노스 11세]]처럼 그들도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다시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면 이들이 모두 돌아와서 성찬예배를 마저 끝내리라는 전설이 남아있다.[* 물론 전설이지, 오스만 측 기록으로는 울며불며 기도하던 이들은 성당으로 들어온 오스만군에게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고자 끌려나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도시를 완전 점령하자마자 성당으로 들어온 [[메흐메트 2세]]가 학살을 그만두라고 명할 때까지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지 않지 않은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인, 즉 동로마인들이 정통 로마 치하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잘 드러내 주는 전설이다. 그리스인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집착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나톨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주민들의 대부분은 신생 독립국인 그리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슬림의 지배를 받더라도 어쨌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리스인들이 터키를 침공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egale_idea.jpg]] [[파일:external/img.fireden.net/1446543560072.png]]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 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 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 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위대한 이상(메갈리 이데아, Μεγάλη Ιδέα)' 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 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 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소아시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이다.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터키 민족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와 [[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튀르크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일이었다. 메갈리 이데아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 왕국은 1832년 독립 이후 이오니아 제도, 테살리아, 남부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금씩 빼앗았다.다만 그리스 왕국이 홀로 차지한 게 아니라 이오니아 제도는 오스만으로부터 뺏어온 것이 아닌 1861년 왕실끼리 사돈 관계였던 영국이 선물한 영토이다. 그리고 차지한 땅들도 그리스 홀로 이긴 게 아니라 강대국들과 연합하여 빼앗아 온걸 차지한 거였다. 그리스 독립도 거저해준게 아니라 그리스에 영국과 여러 강대국이 주둔하고 여러 항만시설 이용권을 거저로 내주고 온갖 무역 특혜에서 여러 모로 내정간섭을 받았던 터였다. 그리스 홀로 오스만에게 덤비다가 하필이면 크림전쟁으로 인하여 오스만과 동맹을 맺던 영국과 프랑스가 분노해 실컷 두들겨 맞고 오히려 이들에게 가진 땅을 내놓으며 온갖 배상금을 뜯긴 적도 있었다. 반대로 그리스 홀로 쳐들어가다가 오스만에게 두들겨 맞았던 적도 많았다. 1차 [[발칸 전쟁]] 때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등과 손잡고 오스만을 뭉개면서 비로소 크레타와 남부 마케도니아 등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거꾸로 2차 발칸 전쟁 때는 오스만과 그리스가 손잡고 같이 불가리아를 작살내면서 불가리아가 1차 발칸 전쟁에서 차지했던 땅을 서로 빼앗아갔다. 하지만 2년도 안가 그리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연합군에 가담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를 위시로 한 유럽 터키 전역과 [[이즈미르]]를 비롯한 일부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리스 홀로 소아시아 해안을 넘어가다 못해 아나톨리아 내륙까지 점령하려다가, 신생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군의 잔해를 급히 긁어 모아 구성한 병력에 격파당하고 말았다.([[그리스-터키 전쟁]]) 그리하여 그리스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러싼 동부 [[트라키아]]는 그리스가 점령했지만, 정작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연합군(주로 영국군)이 주둔해서 그리스군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여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리스의 꿈이라는 건 목표치도 채우지 못한 것이었다.(콘스탄티노폴리스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 성당]]에서 동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려고 했는데 아쉽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1923년에, 터키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땅으로, 그리스 땅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은 터키 땅으로 이주한다는 협약([[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기에 오늘날에는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다. 인구 교환 이후에도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섬들에는 여전히 터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살고 있고,[* 앞서 언급하였듯, 터키인들은 이들을 독립국가 그리스인(Yunan)과 구별하여 '로마인(Rum)' 으로 부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애틋한 감정은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의 <터치 오브 스파이스> - 그리스어 타이틀은 'Πολιτίκη κουζίνα'(도시의 요리) - 에도 잘 나타나있다.[* 잘 보면 자막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의 공식 지명인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리스의 입장이 반영된 부분이다.] 그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었더라도 여전히 로마였으며 '회복해야 할' 땅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새해를 맞아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가사가 나오는데 내용이 인상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성 바실리오의 도움으로 아홉 아들과 아홉 딸을 낳으시길. 딸들은 저마다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살림꾼이 되게 하시고, 아들들은 저마다 훌륭한 병사가 되어 왕들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게 하소서."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 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 그리스어 형용사 ανατολικός는 '동쪽의' 이라는 의미이다. [[아나톨리아]]라는 지명부터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영어로 직역해놓으면 Eastland, Easteria 정도로 치환할 수 있다. 참고로 '서쪽의' 는 δυτικός로 서로마 제국은 Δυτ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같은 표현이 쓰인다. 그러나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 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 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로마에 합병되었다가,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기 이전까지 무려 [[나라 없는 민족|2천 년 가까이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현대 그리스의 공식 입장은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도 기원전 146년부터 1830년까지 2천년 가까이 동안 현대 그리스에 해당하는 권역의 지배 세력은 로마-비잔티움, 남슬라브계 세력[* 그리 오래지 않은 기간 동안 북부나 서부 등 일부 지역 한정으로, [[https://en.wikipedia.org/wiki/Sclaveni|소위 Sclaveni/Sklabenoi라고 불리는 국가형성 전 부족 단계의 남슬라브인]],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제국]] 등], [[4차 십자군]]으로 들어온 서유럽계 세력 및 그 후신[* 라틴 제국, 아테네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 오스만 이렇게가 끝이다. 또한 그리스 독립운동시기 정체성으로 부르짖은 헬라스의 의미가 중세 시대에서는 이교도,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로마 다신교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스 입장에선 그냥 답이 없다. 동로마 제국과 근현대 그리스의 관계는 밀접하다. 공화정기나 제정 초기까지의 그리스 본토나, 넓게 보아 소아시아 서부와 마케도니아 등을 포함하는 에게 해 연안의 확실한 그리스권은[* 즉 非 그리스-로마적인 문화, 언어, 종족성 등이 여전히 상당히 남아 있었던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중-동부 내륙 등의 지역은 배제한.] 로마 본국 이탈리아의 라틴인이라는 외세 내지는 외래종족의 통치를 받았던 점이 확실하지만, 가장 많이 땡겨잡으면 [[카라칼라]]의 212년 시민권 확산 이후, 내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80년대 사두정치 및 '수도와 궁정을 로마 시와 이탈리아 밖에도 둘 수 있다는 개념'의 첫 도입 이후, 혹은 330년 [[콘스탄티노플]]의 완성 이후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동로마 중후기에는 (비단 4차 십자군에 의한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다종족적 제국이라기보다는 점점 민족국가에 가까워졌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단, 이것을 확대해석하여서 마치 21세기 미국 같은 의미의 "혈통에 관계 없이 모두 로마인"이라는 다인종/다문화 사회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동로마의 정당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역덕후 커뮤니티에서 이제 더이상 동로마의 정통성을 진지하게 공격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탈리아(혹은 라틴)과 로마의 연결성을 지나치게 낮추는 실수도 자주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 혹은 라틴인과 로마國의 연결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된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법령으로 포맷된 게 아니다. 동로마의 재평가를 위해 라틴을 내려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br]가령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2 185?-254?)}}}의 저서 《원리론》{{{-2 ''Περὶ Ἀρχῶν''}}}의 라틴어판{{{-2 (루피누스 역, 4세기 말-5세기 초 번역)}}} 제1권 머리말은, 이렇게 말한다:[br]「성경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많은 형제가 그리스 문헌에 능통한 몇몇 학자에게 오리게네스를 로마인으로 만들어 입혀 라틴어 독자들의 귀에도 그를 선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동료인 한 형제(히에로니무스)가 다마수스 주교의 부탁으로 {{{[}}}오리게네스의{{{]}}} 《아가 강해》 두 편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저서의 첫머리에서 누구나 오리게네스의 저서들을 읽고 열심히 탐구하고픈 열망을 느낄 정도로 고상하고 멋들어진 머리말을 썼다. ... {{{[}}}히에로니무스는{{{]}}} 바로 그 머리말에서 ...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다른 저서들도 로마인 독자들에게 {{{[}}}라틴어로{{{]}}} 제공하겠노라고 약속하고 있다.」{{{-2 (이형우 등 공역)}}}] 10세기부터는 기록에 '로마인'이 마치 '아르메니아인'처럼 종족개념으로 나오기 시작하며, 11세기 후반의 저작물 중 하나에는 영어로 번역하면 'a Roman by birth', 즉 '출생에 의한 로마인'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people|Roman people(로마인)]] 중, 'In chronicles written in the 10th century, the Rhōmaîoi begin to appear as just one of the ethnicities in the empire (alongside, for instance, Armenians) and by the late 11th century, there are references in historical writings to people as being "Rhōmaîos by birth", signalling the completion of the transformation of "Roman" into an ethnic description.'], 근현대적 의미의 국적 개념이 없던 중세 시절, 저 구절은 종족적인 의미의 로마인, 즉 '[[로마족]]'(Roman ethnicity)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이러다가 그리스인들이 로마라는 이름에서 탈피한 것의 효시는 그리스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독립한 과정이 처음에는 자력으로 독립하려다가 오스만으로부터 반독립 상태였던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가 보낸 군대에게 거의 진압되었다가 결국 서유럽의 힘을 빌려서 독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서유럽계 왕족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지만 로마라는 국호로 독립하기에는 서유럽과 [[가톨릭]] 교회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오스만의 수도였으며 로마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오스만의 충실한 어용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로마라는 국호를 쓰기 어려웠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people|Roman people(로마인)]]에도 로마인(Romioi)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오스만 치하에 있는 이들을 더 연상케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스만 치하에서 게으른 노예로 있던 로마인과 대립되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인 그리스인(Hellene) 상이 형성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Roman self-identification among Greeks only began losing ground with the Greek War of Independence, when multiple factors saw the name 'Hellene' rise to replace it. Among these factors were that names such as "Hellene", "Hellas" and "Greece" were already in use for the country and its people by the other nations in Europe, the absence of the old Byzantine government to reinforce Roman identity, and '''the term Romioi becoming associated with those Greeks still under Ottoman rule rather than those actively fighting for independence. Thus, in the ey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 Hellene was a brave and rebellious freedom fighter while a Roman was an idle slave under the Ottomans.''''] 물론 그리스인들이 자국(민)에 대해서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용례는, 한국인들이 서울을 한양, 한국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돌려부르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도로 쓰이는 옛 이름으로는 여전히 간혹 쓰인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그리스 현지에서 동로마 제국을 그냥 로마라고 칭하거나 그리스인들을 이단이나 로마인이라고 부르면 [[역린|그리스인들이 경악하는 반응을 보인다.]] 특히 서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 시절부터 그리스인들을 폭행하고 음해했던 문화가 생겼는데, 중세 당시에는 동로마제국은 물론이고 서유럽에서는 그리스인들을 이단이라고 불리며 폭행하거나 '''[[분사|옷을 벗기고 산채로 불태워 지는 등]]''' [[조리돌림]]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동로마 제국 내에서도 그리스인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이다.(이 당시 동로마 제국 십자군들은 그리스인을 제외한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단]]이라는 이유로 십자군 전쟁 참여권을 박탈당했다.) 십자군 전쟁 때 그리스인 십자군이나 기사들이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적은 것도 그 이유. 이는 현대에서도 이어져 현대에서도 서유럽에서 그리스인 죽이기 날이 있을 정도로 그리스인들을 은근히 차별한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으로는 'The Byzantine Hellene', 'Romanland', 'Being Byzantine', 'Hellenism in Byzantium', 'Byzantium and the Modern Greek Identity'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